1. 6월 민주 항쟁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일어난 반정부 시위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고 최규하 대통령이 취임하여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했으나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집권함에 따라 다시 군부 정치가 시작되었다. 5·18 민주항쟁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신군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전두환이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제5공화국이 시작되었다.
1987년 1월 13일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박종철은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 의해 연행되었다. 민주화 추진위원회의 지도위원으로 수배받고 있었던 학교 선배 박종운을 잡기 위한 연행이었다. 다음날 1월 14일 조사를 받던 박종철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하였다. “책상을 탁하고 쳤더니 억하고 쓰러졌다.”가 사망원인이었다. 이 말은 신군부의 고문치사를 나타내는 유명한 한 문장으로 남았다.
1987년 4월 13일 신군부는 국민적 요구였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거부하고 기존의 간접 선거 체제를 유지하겠다고 전두환 대통령의 특별 담화를 통해 선언하였다. 4.13 호헌 조치이다. 4.13 호헌 조치의 주요 내용은 "개헌 논의가 정치적 혼란과 국정 마비를 초래할 것이며 이를 방지 하기 위하여 현행 헌법을 유지해야 한다. 현행 헌법에 따른 간접 선거방식을 유지하겠다. 전두환은 더 이상 대통령직을 연임하지 않겠다."였다. 이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무시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학생 운동, 노동 운동, 종교계, 시민 단체 등이 강력히 반발하며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궐기하였다. 언론과 지식인들은 정권의 비민주적인 태도를 비판하며 직선제 개헌 요구를 촉구했다.
군사정권에 반발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높아졌지만 여전히 신한민주당의 이민우 총재, 이철승 등은 내각제 개헌에 찬성하였다. 이에 반발한 김대중, 김영삼 등은 신한 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 민주당 창당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1987년 4월 20일~4월24일, 통일민주당의 20여개 지구당에 폭력배들이 난입하여 난동을 부렸다. 기물파손, 당원 폭행 등을 일삼았다. 창당 대회는 인근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통일 민주당은 이러한 정치공작에 비판을 가하며 수사를 요구했지만 흐지부지되었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6.10일 반정부 시위에 대한 결의를 마치고 시위하며 나오는 과정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이한열 학생이 뒷머리를 맞고 1달 뒤 사망하였다. 사건이 미국인 기자에 의하여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되면서 6월 민주 항쟁의 시위 규모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전국적으로 대규모 집회를 열 것은 선언하며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시위는 학생, 일반시민, 종교인,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으로 확산하였다. 매일 수십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였고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다. 경찰은 이를 강경하게 진압하였다. 그런데도 국민의 민주화 요구는 계속 강해졌다. 이한열 열사의 사건으로 여론은 더욱 결집 되었다.
2. 6월 민주항쟁의 결과와 의미
항쟁은 국민적 열망과 국제적 압력 속에 정부가 타협안을 발표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는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를 약속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였다. 국민의 요구가 관철된 것으로 헌법 개정을 통해 민주주의적 기본권이 강화되었다. 이후 헌법 개정을 통하여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하였고 16년 만에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창당된 통일 민주당의 고문이었던 김대중과 총재였던 김영삼이 공식 선거전을 앞둔 1987년 10월에 분열되었다. 그리고 각자 독자 출마를 강행하였다. 6월 민주항쟁의 중심 세력들이 통합되지 못하였다. 결국 1987년 12월 16일에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6월 민주항쟁은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 번째는 군부독재의 몰락과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되었다. 독재체제의 종식을 선언한 것이다. 노태우 정권의 출범으로 군사주의가 완전히 끝났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가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는 평범한 시민들이 연대하여 민주화를 이룬 사례로 한국 사회에서 시민 사회 운동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시민들의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웠다. 세 번째는 대통령 직선제 도입과 더불어 언론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등 민주적 기본권의 확대가 이루어지면서 헌정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3. 6.29선언의 내용
6·29 선언은 1987년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였던 노태우가 발표한 특별 선언으로,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민주적 개혁을 약속한 조치이다. 이 선언은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이루어졌으며,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1. 대통령 직선제 수용
2.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민주적 절차를 강화할 것을 선언
3. 언론 통제를 완화하고 언론의 자유 보장을 약속
4. 시국 사건으로 구속된 인사들을 석방하고 과거의 정치적 탄압을 해소하겠다 발표
5. 지방자치제를 점진적으로 도입하여 지역 민주화를 실현할 것을 약속
6.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할 것을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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