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ood-story

4.19혁명 원인 전개 과정 결과 및 평가 (사사오입 개헌)

by food-storyteller 2025. 1. 15.

 

1. 4.19혁명의 원인

4·19혁명은 1960년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으로, 독재 정권의 부정부패와 권위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로 인해 일어났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4·19혁명의 가장 큰 원인은 이승만 정부의 독재와 부정부패였다. 1공화국 시기, 이승만 대통령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며, 부패한 정치를 지속했다. 특히,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재임 제한을 철폐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한 "사사오입 개헌"은 국민들의 불만을 크게 자극했다.

이후 1960 3월에 치러진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정부는 부정선거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을 강행했다. 선거 과정에서 투표함 바꿔치기, 유권자 매수, 폭력적인 선거 개입, 공무원을 통한 선거운동 망 조직, 경찰의 선거운동 망 감시 독찰 등의 부정행위가 만연했다. 이에 따라 민심은 극도로 악화하였고, 학생들과 시민들은 정부의 비민주적 행태에 저항하기 위해 시작했다.

 

- 사사오입 개헌에 대해 알아보자. 사사오입 개헌은 1954년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 중임 제한을 철폐하기 위해 추진한 헌법 개정 과정에서 발생한 논란을 말한다. 당시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한 번만 재선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헌법 개정을 통해 중립 제한 규정을 삭제하려고 하였다. 장기 집권을 위한 조치였다. 19541127일 국회에서 헌법 개정안이 상정되어 표결에 부쳐졌다. 헌법이 개정되려면 당시 국회의원의 2/3135.333... 명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했다. 당시 찬성표는 135표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203의 수학적 2/3135.333... 이지만 0.333... 0.5 미만으로서 수학의 사사오입 원칙에 따라 버릴 수 있는 수이므로 203명의 2/3135명이라고 주장했다. 이 논리는 단순한 산술적 오류를 악용한 것으로 법적 정당성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승만 정권은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사사오입 논리를 근거로 중임제한이 철폐되고 이승만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재출마할 수 있게 되었다. 국민들은 이 사건을 통해 이승만 정권의 독재적 성격과 비민주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승만 정부의 신뢰도를 크게 하락시켰다. 사사오입 개헌은 헌법 정신과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한 사례로 이후 독재정권의 탄압을 정당화하는 선례가 되었다. 또한 19604·19혁명의 도화선 중 하나로 평가된다.

 

2. 4·19혁명의 과정

4·19혁명의 시발점은 1960228일 대구에서 시작된 "2.28 학생 의거"이다. 이때 대구 고등학생들은 정부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고, 이는 전국적으로 확산하였다.

1960411일에는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 중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의 시신은 최루탄이 박힌 상태로 바다에서 떠올랐으며, 이는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419, 전국적으로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경찰은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지만, 시위는 점점 격화되었고, 희생자도 속출했다. 결국 425일에는 대학의 교수들까지 "4.25 교수단 시국 선언"을 통해 시위에 동참하며 정부를 비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점점 고립되었고, 미국조차 그의 퇴진을 요구했다.

 

3. 4·19혁명의 결과 및 평가

4·19혁명은 독재 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다. 1960426,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들의 압력과 미국의 권고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그는 하와이로 망명하며 제1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이 혁명을 계기로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과도정부가 구성되어 민주적인 헌법 개정과 정치개혁이 이루어졌다. 2공화국 헌법은 의원내각제를 도입하고 권력 분산을 꾀했으며, 표현의 자유와 시민권을 확대하는 등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4·19혁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이후에도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정이 지속되었으며, 1961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민주주의는 다시 한번 시련을 겪게 된다. 그런데도 4·19혁명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각인시켰고, 독재에 맞선 국민적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결론적으로 4·19혁명은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이는 국민이 스스로 권리를 지키기 위해 행동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후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큰 영감을 주었다. 오늘날에도 4·19혁명의 정신은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의 근본적 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